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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투

책을 펴내며

포스트잇에 한 문장을 쓰더라도 이 세상 전체를 향해 써야 한다. 이것이 내가 배운 ‘비평하기’의 명제 중 가장 앞서는 것이었다. 2009년 봄에 첫 글을 문학잡지에 싣고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글 한 편, 한 편을 쓸 때마다 신수정 평론가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어느 한 특별한 시기를 만나기 전까지 내게 비평은 ‘혼자’ 쓰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막막한 대로에서 혼자 자신만의 길을 찾으며 써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고, 그러니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서 나의 길을 찾기 위해 오래 분투했다.

 

그러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의 시간 속에서 페미니즘 비평은 결코 ‘혼자 쓸 수 없는’ 전혀 다른 장르로 경험되었다. 그 점에서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과 독자 시대의 한국문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13인의 평론가 글들을 모은 『#문학은_위험하다』(민음사, 2019)가 나의 첫 공동 저서가 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한 권의 책에 같이 묶인 글들이 의도치 않아도 저절로 맞물리고 충돌하고 겹쳐지며 확장되는 독서 경험은, 나 자신을 단독자로서의 비평가 개인이 아니라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비평가로 재정립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은_위험하다』 출간 이후, 또래 소설가 모임 왓에버(조우리, 차현지, 천희란)는 ‘위험한 북토크’를 기획 및 실행하여 13인의 평론가들이 백 명이 넘는 비평 독자들과 실제로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 선물과도 같은 경험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비평의 위기’라는 진단은 어쩌면 비평이라는 장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비평을 다뤄 온 방식의 문제가 아닐지 고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글쓰기가 문학비평계 내에서만 통용되는 문법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향한 목소리가 되려면 어떻게 책을 구성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누가 비평을 읽는가〉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를 고안하였으며, 이 책이 일반적인 문학평론집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 기획을 설명하는 제안서를 만들어 배포한 후 선 판매를 시작함으로써, 책의 제작비 전액을 비평 독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ISBN이 없는 독립출판물을 기획하였으나 비평 독자들의 참여에 의해 제작비 전체를 마련하게 되자 기존과는 ‘다른’ 비평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갈증에 대한 체감 속에서 나의 작업이 단지 문학의 존립 근거를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2021년의 한국사회에서 예술과 비평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작업이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제 문학비평가들뿐 아니라 타 장르 비평가들과도 함께 대화하면서 읽고 쓰고 싶다.
 

첫 단독 비평집, 『침투』의 표지와 내지를 포함한 모든 디자인을 맡아준 디자이너에게, 염두에 두었던 독립출판물이 아니라 비평 전문 출판사의 첫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을 처음 전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문학웹진 《비유》를 창간 준비하던 시절부터 3년간 기획자와 디자이너로서 호흡을 맞춰왔기에, 누구보다 신뢰하는 신건모 디자이너는 새 출판사의 시작을 축하하며 출판사 로고를 선물하고 싶다고 제안해 왔다.


보통의 책 모양을 상징하는 도형의 이름인 ‘사각’은 그 한글의 모양이 시옷과 기역이 반복되는 형태였고, 이름의 뜻과 달리 여러 삼각형들을 연상시키는 자음들이 모여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극했다. 출판사 이름이 어째서 ‘사각’이냐는 디자이너의 질문에 위의 대답을 들려주었고 이를 충실히 반영한 로고를 선물 받게 되었으며, 현재 이 로고를 SNS 프로필 사진에 걸고 장르별로 흩어진 타 장르 비평가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플랫폼을 모으며 직접 글을 먼저 찾아 읽고 인상적인 지점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침투』의 전체 교정 교열은 희음 시인이 맡아주었다. 우리는 ‘#문단_내_성폭력’ 피해자 모임 ‘아가미’ 좌담회에서 만났으며 연대자이자 활동가로서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로 약속 없이도 여러 번 만나며 신뢰를 쌓아 왔다. 페미니스트 시인이자 프리랜서 편집자, 기후정의 활동가, 기록노동자, 문화활동 기확자인 희음 시인은, 비평가란 기획자이면서 동시에 활동가여야 한다는 나의 비평적 정체성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였다. 그리하여 신건모 디자이너와 희음 편집자를 중심으로 한, 비평 전문 출판사 ‘사각’의 첫 책으로 『침투』를 내놓는다. 이 책에 실린 열두 편의 비평은 문학잡지에 발표된 글들이기에, 문예지를 따라 읽지 않아 문학평론 특유의 맥락에 낯선 일반 독자들이 곧장 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각 글의 시작과 끝에 글에 대한 소개를 추가해 독자들이 글을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열두 편의 글은 순차적이지 않으며 독자들이 열두 장의 카드를 섞듯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세 종류의 목차를 마련했다. 각기 다른 맥락 하에서 작성된 글들이 시계 모양의 목차 속에서 시침과 분침으로 두 편씩 엮이기를, 사회/작가운동/담론/비평의 네 가지 층위로 나뉜 타임라인 속에서 시간성을 사유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부제로 보다 상세히 글의 주제를 설명하여 직관적으로 글에 다가갈 수 있도록, 세 종류의 목차를 통해 여러 질문들이 서로 교차되며 스파크처럼 튈 수 있도록 목차가 고안되었다.

 

비평을 쓴 지 올해로 13년 차에 접어들었다. 앞으로도 비평가로서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겠으나 앞으로 쓰이게 될 글은 그동안 써 온 글들과는 꽤 다른 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12년 동안 쓴 비평들 중 2021년에도 유효하다고 판단된 열두 편의 글로 구성된 책이지만 동시에 2009년부터 2020년까지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글들의 묶음이기도 하다. “포스트잇에 한 문장을 쓰더라도 세상 전체를 향해 써라” 했던 신수정 평론가의 가르침에 힘입어, 문학잡지 지면을 청탁 받아 글 한 편을 쓰는 것으로 만족하는 비평가에 그치지 않고 비평과 세상을 이어지게 만드는 방법 역시 고민하고자 한다.


이 책은 나의 현재 능력으로는 도저히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던 소영현 평론가의 질문, “우리가 삶을 물을 수 있는가”(『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 2017)라는 질문을 기저에 두고 있다. 도저히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비평가로 만들어준 소영현 평론가의 존재는 나의 개인적인 행운에 국한되지 않는, 문학비평사의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비평가로서 저 질문에 성실히 답할 것이다.
 

어느 지면의 자기소개에서, “10년간 문학평론가로 살아왔고, 앞으로 이 일을 더 할지 그만둘지 고민 중이다. 만약 더 하게 된다면 다르게 하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이제 막 사업자 등록을 마친 비평 전문 출판사 ‘사각’과 이 책이 그에 답하는 첫걸음으로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해봐야 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이 책의 물성에 대한 이미지 한 컷조차 보지 않고도 선뜻 책값을 미리 내어주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침투』(사각, 2021)의 비평 독자들에게, 앞으로 사각 출판사에서 출간될 모든 책은 폭력에 맞서는 언어일 것을 약속드린다.
 

2021년 3월
장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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