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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anny Youth

by Revy Breaux

​released November 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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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안에서 쓰인 언캐니의 기록

Revy Breaux(이하 Revy)는 고뇌한다. 『Uncanny Youth』 라는 앨범의 제목에서 ‘Youth’라는 낱말은 그의 과거를 지시하는 것일수도 현재를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의 ‘Youth’에서 언캐니(Uncanny)함을 느낀다는 사실일 것이다. 

본작의 제목에서 언캐니라는 낱말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의 논문에서 사용한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Revy는 일전에 영화 “로건”을 보고난 후 ‘X-Men’ 코믹스들을 찾아보다가 “Uncanny X-Men”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언캐니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서울 강남이라는 본인의 거주지가 대기업인 신세계를 주축으로 재건축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낯섦을 경험했던 바 있다. 

이러한 차이는 흥미로운 감상을 선사했다. 본작의 제목이 『Uncanny Youth』 인 데에는 어떠한 학술적 계기가 없고, 다만 그것은 “Uncanny X-Men”의 변용일 따름이다. 그러나 본작에서 포착되는 정서를 나는 능히 언캐니라는 이름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본작의 이야기가 그 자신이 높은 계층성과 소수자성을 양득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것들이 그의 안에서 관계할 때 전자가 후자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짧은 이야기 II」의 “쿠팡 장바구니와 마켓 컬리의 내 먹을 것들은 배송비가 배달해준 것 같애”와 같은 라인들이 그렇다).

나는 본작을 감상하며 그가 그 자신의 계층성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인 사유를 해왔는지를 느꼈다. 가령 첫 트랙인 「land locked state」와 그에 이어지는 트랙 격인 「울타리」는 “다 큰 꿈을 꾸네, 마치”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 구절은 “큰 꿈”의 울타리 안에 있는 Revy 자신의 계층성에 대한 통찰과 그 안으로 진입하고자 관성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의 전경을 동시에 그려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의 높은 계층성을 손에 쥔 채 혼란스러워한다. 「townie」에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자신이 “강남 바닥에 아직 붙어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정신질환과 싸우며 고층 빌딩의 옥상 위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Uncanny Youth』에서 붙잡고 있는 가장 큰 화두는 Revy에 뒤따르는 여러 ― 특히 그의 소수자성과 연관된 ― 술어들이나 그가 마주했던 여러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과 그의 계층성과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울타리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며 일전에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은 곧 본작을 최종적으로 수식한다. 다음과 같은 라인이 특히나 그렇다.

“이 비틀 만든 프로그램, 노트북, 마이크 / 오디오 인터페이스 죄다. 공짜로 얻은 거야 / 이상하게도 죄인 것 같애 / 오늘 점심 먹은 이 건물은 누구의 목 죈 것 같애” (「짧은 말」)

본작의 화두를 붙잡고 이야기를 더듬어 가다 보면 성-지향성, 사랑, 관계, 노동, 감정, 정치와 같은 다양한 주제의 트랙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살폈듯 그의 계층성과 각각의 주제들을 매개하는 것은 ‘언캐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작은 그가 자신이 차단해왔던 것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구분지음의 시도**에 실패해왔던 순간들을 적어 내려간 일종의 기록과 같다.

하지만 본작에서 드러나는 그 실패의 순간들은 마냥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Revy가 자신이 겪은 언캐니에 대해 해결이나 극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 그가 본작에서 성큼성큼 나아가며 당차게 랩을 뱉는 것처럼. 오히려 그는 그의 언캐니를 한 발 떨어져 보며 그것을 해결하거나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만일 Revy가 언캐니를 극복하거나 해결하고자 했다면 그는 그가 차단하고 구분 짓고자 했던 낯선 것들을 영영 그의 삶 밖으로 몰아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작에서 그가 취하는 태도는 그렇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언캐니의 모태가 곧 그 자신과 밀접하기 때문에, 그는 언캐니를 삭제하는 방법으로는 삶을 온전히 존속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본작 곳곳에서 등장하는 ‘자살 관념’은 그러한 사투의 흔적이다. 그 역시 끝내 자신의 삶을 놓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그 대신에 Revy가 취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는 언캐니를 극복하는 대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그는 기타 베이스의 산뜻한 트랙 「bi-probs」에서 이분법적인 카테고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언캐니를 느끼지만, 종국에는 “근데 너의 눈동자를 보면 내가 누군지 알 것 같애”라고 말하며 언캐니를 마주할 용기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townie」에서 고통에 휩싸인 화자가 마지막에 이르러 벅차오르는 소리의 상승과 함께 ‘너’를 호명하며 술잔을 내려놓는 반전 역시 깊은 울림을 전한다. 
 

『Uncanny Youth』에서 언캐니는 여러 방면으로 착종되어있고, 때로는 트랙 전체에서, 때로는 산발적인 라인으로부터 드러난다. 그리고 앞서 살폈듯 그것들은 그의 계층성을 거치며 젠더-이슈, 노동 문제, 정치적 의제 등으로 환원된다. 그런데 Revy가 그의 언캐니를 술회하는 시도는 단지 노랫말에만 국한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본작의 노랫말에만 천착하지 않고 감상할 때에야 그가 자신의 언캐니를 음악으로 번역하려한 시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밝고 산뜻하게, 때로는 다소 음울하고 가라앉게, 때로는 벅차오르고 웅장하게 직조된 소리들은 우리가 본작을 독해하는 데 좋은 참조점이 된다.

「rain pouring over candle」은 사운드 면에서 Revy의 역량이 훌륭히 발휘된 결정적인 지점이다. 점잖은 기타 연주를 시작으로 점차 트랙이 쌓이고, 소리가 거칠게 확장되어가는 모습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분노를 형상화하고, 이는 제목 그대로 ‘촛불 정권’의 위로 내리는 빗줄기라는 정치적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우리는 그 거대한 분노를, 그리고 당시 상황을 목도했던 그가 소리로 표현한 언캐니를 노랫말 하나 없이 절로 체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그 자신으로부터, 또한 그가 목도했던 여러 사건들로부터 느꼈던 언캐니를 그의 계층성과 연관 지으며 음악으로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언캐니를 마주하며 끝없이 고뇌해왔기 때문이다. 본작은 그 흔적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앨범은 한국힙합의 형식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재 메인스트림을 포함해 다른 어떤 한국의 랩/힙합 앨범과도 결이 다르다.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독보적인 발자취이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이 ‘독보적’이라는 낱말의 쓰임은 『Uncanny Youth』가 다른 어떠한 랩/힙합 작품들보다 빼어나다는 말이 아니라 본작이 지니고 있는 정서가, 누구도 아닌 그만이 그려낼 수 있는 정서이기에 다른 차원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본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해 겨울 우리는」과 「Uncanny Youth」는 각각 “지금쯤 나아질 거라 믿었는데”와 “지금의 내가 원하고 목매는 건,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목매지 않는 거야”라는 라인으로 대표되는 절망과 희망의 서사다. Revy가 느꼈던 언캐니는 그에게 숱한 괴로움을 안겨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무릎 꿇지 않고 어쩌면 자신과 같을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괴로움을 겪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이것이 그가 고뇌를 통해 가지게 된 실천적 의지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그는 나에게 『Uncanny Youth』는 연작이 될 예정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의 다음 스텝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비범한 신인의 두근거리는 데뷔작이다. / 20211119
 

* 독일어 Unheimlich를 영역한 낱말로서의 ‘Uncanny’는 우리나라에서는 ‘두려운 낯섦’이라는 번역어로서 소개된 바 있다. “S. Freud, 『예술, 문학, 정신분석』, 「두려운 낯섦」, 열린책들, 2003” 참조.

** 앞 각주에 이어, Unheimlich란 오래전 친숙하고 편안했던 것이 ‘억압’되어 낯설고 불편하며 섬뜩한 것이 되어버린 상태를 지시한다. 여기서 ‘억압’되었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생각이 지나치게 강한 긴장을 수반하는 탓에 더 이상 그것을 생각하거나 기억할 수 없도록 ‘차단’해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언캐니, 즉 두려운 낯섦이 어떠한 감정으로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차단해온 억압된 것들이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떠오를 때일 것이다. 언캐니를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 지으려는’ 시도가, 동시에 후자의 영역을 드러나지 말아야할 것으로 위계화하려는 시도가 일순간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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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담당편집_ 정예인

9년 차 출판편집자. 출판사 세 군데를 거치며 인문/사회/예술/건축/과학/에세이 등의 분야에서 기획자이자 편집자로 일했고 현재 속한 데 없이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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